讀하는 여자
2022년, 많이 회자되었던 단어 중 하나는 ‘해방’이다. 이전까지 ‘해방’은 일상생활에서 자주 접하지 않았던 단어였다.
어딘가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마음을 뜻하는 ‘해방’의 언급량은 전년 동기간 대비 100% 증가했다. 언급량의 증가는 4월부터 방영된 JTBC의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의 영향이 크다. 드라마가 종영되고 하루가 지난 5월 30일, ‘해방’의 언급량은 최고치에 달했다.
사람들이 <나의 해방일지> 공감했던 부분 중 하나는 ‘해방 클럽’ 장면이다. 직장에서 사내 동호회에 가입할 것을 요구하자 ‘해방 클럽’이라는 동호회를 만들었다. 해방 클럽 회원들은 강제로 어디에도 소속되기 싫고, 사회생활에 피로감을 느낀 사람들이다. 해방 클럽에서는 자신들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 행복해 보이려 애쓰지 않는다. 무표정한 얼굴, 우울하고 답답한 마음 또한 나의 일부이고 내 모습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해방이 시작됨을 깨달았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가 끝난 3개월 뒤 정지아 작가의 장편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 출간되었다. 화자의 아버지는 사회주의자로 빨치산 대원이었다. 연좌제가 있었던 시절이라 아버지는 가문을 풍비박산 냈으며 화자에게는 ‘빨치산의 딸’이라는 굴레를 안겨 주었다. 화자는 아버지의 장례식장을 지키고 조문객을 맞으며 그들이 들려주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를 좀 더 알았다. 책을 다 읽고 나면 뒤표지에 적힌 ‘내가 알던 아버지는 진짜일까?’라는 문구가 의미심장하게 와닿는다.
몇 년 사이 우리 사회는 사람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 하는 욕구가 커졌다.
사람에 대해 아는 방법 중 하나가 ‘MBTI 검사’다. 10여 분 정도 시간을 투자하면 16가지의 성격 유형 중 나와 타인이 어떤 유형에 속하고 어떤 특성을 가진 사람인지 알 수 있다. 2~3년 전부터 MBTI 검사가 유행이 되면서 자신의 MBTI 결과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는 것처럼 되었다.
MBTI와 비슷한 검사로 ‘에니어그램’이 있다. 사람의 성격의 근간을 머리, 가슴, 배로 나누고 이를 다시 9가지 유형으로 나눈 것이다. MBTI보다는 덜 대중적이지만 코로나 확산 이전에는 문화센터나 도서관 프로그램으로 에니어그램으로 사람의 성격을 알아보는 강좌가 열리기도 했다.
또, 동양의 성격학이라고 불리는 ‘명리학’으로도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자신이 태어난 해(年), 월(月), 일(日), 시(時)를 계산하여 길흉화복을 점치는 방법으로 흔히 사주라고 부른다. 사주를 보는 이유가 앞으로 일어날 일이 궁금해서 이기도 하지만 그전에 어떤 사람 인지가 먼저 파악돼야 하기 때문에 사주를 보는 것만으로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성격 검사를 어떻게 생각할까?
썸트렌드를 통해 MBTI, 에니어그램, 명리학의 긍∙부정을 비교 분석해 본 결과, 긍정의 반응이 각각, 70%, 65%, 60%를 차지했다. 공통으로 나타나는 반응은 ‘좋다’는 긍정적인 반응이다. 자신을 잘 설명하는 결과가 나오면 신기해하고 ‘진심’으로 믿거나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나의 해방일지>에서는 자신을 아는 것이 해방의 시작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해방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는 듯하다.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이상하게도 불협화음이 생겨 또다시 ‘나는 누구인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썸트렌드를 통해 가족 관계, 친구 관계, 직장 동료 관계를 비교 분석해 본 결과, 부정의 반응이 각각 56%, 53%, 51%를 차지했다. 공통적인 부정 단어는 ‘스트레스’이다. 관계 맺는 것은 어렵고 힘들다. 고민하게 만든다. 관계 맺는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MBTI로 어떤 사람인지 규정짓는지도 모른다. 내항형인지 외향형인지, 즉흥적인지 계획적인지 파악한 후 나와 잘 맞는지를 따진다. 그리고 단정지어 버린다. ‘A는 이런 사람이구나!’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와 보면,
화자가 알던 아버지는 빨치산 대원으로 할아버지를 죽게 만들었고, 육사가 되고자 했던 큰 아버지 장남의 앞길을 막았고, 딸을 결혼식 전날 파혼하게 만든 인물이다. 아버지 장례식장에 모여든 사람들은 저마다 얽힌 아버지와의 인연을 밝히며 고마움의 표현했다. 목숨을 구해주고, 나쁜 길로 빠지지 않게 도와줘 고마운 마음에 찾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던 화자는 ‘아버지에게 그런 면이 있었나’ 하며 그동안 아버지를 ‘사회주의자, 빨치산 대원’으로 가둬 둔 것을 후회했다. 살아계실 때 아버지에게 잘할 걸 이란 후회보다는 아버지에 대해 몰랐던 것을 후회했다. 아버지는 죽음으로 ‘해방’되었다. 아버지의 삶은 규정된 틀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방 일지 였다.
“천수관음보살만 팔이 천 개인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도 천 개의 얼굴이 있다.
나는 아버지의 몇 개의 얼굴을 보았을까?
내 평생을 알아온 얼굴보다 장례식장에서 알게 된 얼굴이
더 많은 것도 같았다. (중략)
그저 내가 몰랐을 뿐이다.”
사람의 성격을 분류하고 이름 붙이고, 언제 태어나 어느 세대에 속하는지 규정하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천의 얼굴을 가진 우리는 규정될 수 없다. 잘 쓰이지 않았던 ‘해방’이라는 단어가 드라마와 책의 제목으로 왜 쓰이게 됐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외향적이면서도 내향적이다.
나는 계획적이면서도 즉흥적이다.
나는 대범하면서도 소심하다.
나는 부지런하면서도 게으르다.
나는 활발하면서도 얌전하다”
우리는 자신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또 다른 얼굴을 가진 내가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나를 규정하는 것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우리의 하루하루가 해방 일지다. 해방의 기쁨을 누리는 삶을 계속되길 바라본다.